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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이청준님을 보내며 본문

짧은 생각들

이청준님을 보내며

미닉스 김인성 2008.08.09 16:28

이청준님께서 가셨습니다.

그가 질투하던 백년 후의 세상을 저도 보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꼭 그 시간만큼을 아쉬워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라지는 순간부터 그 다음은 언제나 질투 나는 시간이겠지요. 장난스럽게 말하자면 오늘 우리가 듣는 빠삐놈은 어제 죽은 그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악마의 음악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억압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 젊은 우리를 각성시켰던 당신들의 천국도 있었지만 스스로 병원을 나섬으로써 세상에 뛰어들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퇴원으로 시작하여 매잡이와 같은 소재에 집착하는 관념적인 글도 있었지요. 집요하게 파고드는 언어들이 지겨울 때도 있었으며 작은 계기로 전체 상황이 반전되어 버리는 특이한 전개가 이해하기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것이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도 복잡했지요. 잃어 버린 말을 찾아서에서는 거짓된 말이 서로 은밀히 야합을 하고 교미를 하여 자기 확대되는 불신의 시대를 고발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선학동 나그네에서 보여지듯이 소리를 통한 구원을 통해서야 말을 되찾을 수 있음을 이야기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길이 합쳐지는 다시 태어나는 말은 삶이 말이 되고 말이 삶이 되는 세상, 거짓된 언어가 죽고 진실한 언어로 된 세상을 꿈꾸었지요. 불성무물일까요? 오늘 이 시대 그는 거짓의 언어들이 다시 판치는 현장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들이 그의 역할을 기대할 때, 한 선각으로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기를 원할 때 기로수씨의 마지막 심술처럼 우리의 바램을 저버리고 훌쩍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화밀교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미 다 이야기 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기나긴 시간을 거치며 이미 우리들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가 전해 주었던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언제나 우리를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했었고 언어가 그 본질을 잃어 버릴 때 떨쳐 일어 나야 한다는 자각을 이미 우리 DNA 속에 심어 주었지요. 우리가 이루어 낸 민주주의라는 절차를 지키는 것보다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 더 중요해 졌을 때, 더 이상 민주주의가 지켜질 전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저마다 횃불을 들고 산을 내려 갈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 백 년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이제 아무도 여기에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보다도 더 분명한 사실이 있으랴. 그때 우리는 이곳을 떠나가고 지금은 그 목소리나 생김새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인간들이 이 곳을 드나드는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을.

 

아니 도대체 그는 어떤 내력으로 그 곳에다 그런 독백을 남기고 싶어졌더란 말인가. 그의 생애에 대한 낭패감과 체념에서 헤어날 수 없는 어떤 절망감에서? 외로움에서?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생애 가운데의 어느 대목쯤 되는 곳에서? 어느 해 어느 날쯤에? …… 그도저도 다 버린 채 이젠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 간 세월 속의 허망스런 인간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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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 이제 나의 가슴 속에서 어떤 암시인 양 안타깝게 피어 오르고 있는 말들을 무작정 혼자 지껄여 나가기 시작했다.

 

---- 백 년이 흐르고 나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으리라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입니다. 맞는 말이에요. 나도 줄곧 그렇게 믿어 왔었구요. 하지만 난 오늘 저녁 아무래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아요. 아니 그 말이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어요. 틀렸다기보다 그냥 믿기가 싫어진 거지요. 적어도 그 말이 가르쳐 준 진실보다 더욱더 분명한 것이 있는 것만 같은데, 그게 무언지가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단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난 아까 거기서 댁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질 않았는데…… 그때까진 그런 대로 모든 게 정연한 편이었는데 말입니다.

 

---- 아니에요. 전 우습게 생각하지 않아요. 오늘 저녁 선생님이 제 곁으로 다가오시고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어요. 믿었던 것이 믿을 수 없게 되고 지금까진 믿고 싶질 않았거나 믿으려조차 해 보지 않은 일들이 분명한 사실이 되어 나타나고…… 마치도 그 쓸쓸하고 암울스럽던 수많은 저녁들의 종소리가 갑자기 생기에 찬 찬송 소리로 돌변해 들려 오듯이……

 

나는 이제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다방문을 나서고 보니 바깥은 언제부턴가 탐스러운 함박눈이 조용히 송이져 내리고 있었다. 아늑하고 정겨운 저녁 거리였다.

 

--낙서를 쓴 건 두 사람이었어. 흐르는 시간을 질투하는 사람들……

-- 그리고 그날도 아마 오늘처럼 포근한 저녁 눈이 내리고 있었을 거구요.

 

pp.273-283. 따뜻한 강, 이청준, 1986, 우석출판사.

 

님의 글은 저의 고통스러운 젊음의 시기에 구원이었으며, 현실의 추상으로써의 지적 자산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안녕히 가시기를, 그리고 조금은 행복해하셔도 허물이 되지는 않을 듯. 님은 갔어도 님은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 계실 것이므로.

 

2008년 여름, 그대 없는 세상에서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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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 프로필사진 대나무잠자리 2008.08.13 10:10 신고 멍하니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다가, 동서울 터미널에서 주섬 주섬 짐을 챙기셔서 내리시는, 이문열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인사를 드릴까 말까 망설이는 와중에, 뭔가 표정이 밝지 않으시길래, 하기사 한번도 표정이 밝으신 모습을 뵌 적이 없지만 서도, 그냥 패스했었지요.

    세상을 떠나신 후에 많이 후회 했습니다.

    좋은 사람들은 하나 둘 가나 봅니다.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minix.tistory.com BlogIcon 미닉스 김인성 2008.08.13 17:58 신고 수정하면 글쓴이가 관리자 아이디로 바뀐다고 하는군요. 이문"구" 님임을 명시해드립니다.

    사실 저는 "문열공 죽다"라는 서사 가득찬 패러디성 장문을 기획하고 있기도 하지요. 이청준님에 대한 글을 쓰면서 문열아저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잘 들여다보면 문열아저씨와 이청준님의 문장이 닮은 곳이 많습니다. 패러디성으로 말하자면 그 어떤 아지못할 기운이 동 시대 두 선각에게 어떤 기류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던지...... 또한 그 것이 그들에게 있어 한 살이의 격조로 작용하지는 않았을런지...... 물론 이제 그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허망한 몸짓에 불과하기에......

    시대가 하수상하여 이청준님을 안타까워하는 만큼 문열공의 죽음은 서정주만큼이나 쓸쓸할 것이라는 어두운 예감에 그의 "시인"을 읽고 그에게 재주는 주었으나 염치를 주지 않은 하늘을 원망한 적도 있음에랴, 안타까워라 금시조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그 결말 또한 그와 많이 다르리라......
  • 프로필사진 대나무잠자리 2008.08.13 10:11 신고 장난도 아니고 실수 했습니다. 이문구 선생님입니다.
    수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프로필사진 대나무잠자리 2008.08.14 18:51 신고 문열공이나 민새군을 볼 때 마다, 뜬금없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 귀절이 생각납니다.

    인간에게 교육이란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필요한 것인지, 무식하면서 재주있는 재사들이 얼마나 똥탕을 튀길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주 소중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쪽팔림이 극에 달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임상체험의 사례 같기도 하고.

    문열공은 원래 대단한 독서광으로 알고 있었고, 민새군도 청나라에서 GR 까면서 공부를 하신 줄로 알고 있는데, 많이 안타깝습니다.

    어쩌다가 전여옥 여사와 비슷한 반열에 까지 올랐는지, 두분 모두 먼 옛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다가 옵니다.

    잊읍시다. 그리고 이제 그만 놓아 줍시다.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minoci.net BlogIcon 민노씨 2008.09.05 03:56 신고 뒤늦게 찾아뵙네요.
    이청준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서야 달리 이론이 없겠습니다만...
    이청준씨께서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이었다는 점은 저 개인적으론 깊은 아쉬움입니다...
  • 프로필사진 Favicon of http://minix.tistory.com BlogIcon 미닉스 김인성 2008.09.09 11:01 신고 반갑습니다. 저도 바빠서 늘 이렇게 블로그 업데이트가 늦습니다. 좋은 추석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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