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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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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성의 크리스마스 선물

미닉스 김인성 2018. 12. 20. 16:35

(긴 글 주의)


이 글은 제가 아직 아마추어 작가였던 2009년 크리스마스에 쓴 글이며,

"IT가 구한 세상" 에필로그로 재활용되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쓴 글 중에서 세월이 가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글 중 하나입니다.

아직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다시 정리해서 발행합니다.

(길지만 재미있습니다. 사실 제 책의 본문은 재미 없다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 같은 톤의 글만 담은 책을 써 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정도입니다.ㅠㅠ)


곧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솔로분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브부터 이틀동안 잠을 자서 이 잔인한 명절을 넘기시기 바랍니다.^^


맨날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다루었으므로 이번에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성장

저는 사회의 발전만큼이나 각 개인의 진보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야 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취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과거부터 사회 시스템은 공정할 때도, 불공정할 때도 있었습니다. 고려 말의 혼란과 조선 초기의 새로운 세상, 삼정이 문란했던 조선 말기와 동학 혁명, 절대 군주를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 후의 공화정과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 어떻게 보면 세상은 질서와 무질서를 시계추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시계추의 움직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닌 더 나은 곳으로의 이동을 동반하겠지요. 인간 사회는 영락을 거듭하며 영구적으로 동작하지만 한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 죽는 단 한 번의 삶만이 가능합니다. 

어떤 시스템이든 쓰이는 인간과 버림받는 인간이 있습니다. 이런 선택을 사회의 절대적인 차별과 불평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든 쓰임 받는 데는 개인적인 노력이 분명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건대 80년대를 살았던 젊음들의 비극은 낮에 사회를 바꾸겠다고 싸우러 다니느라 피곤해서 밤에는 술을 마시거나 그냥 자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자기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를 수행한 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386들 대부분이 얼치기 전문가일 뿐 사회를 변화시킬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사회의 개혁과 발전에 대한 관심과 노력도 매우 가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의 개인의 수련도 절대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저는 사실 사회의 변혁보다는 각 개인의 변화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진보에 대한 이야기보다 개개인들이 진보상 받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 스스로 달라지는 것, 오랫동안 성장을 멈추었던 사람들이 다시 성장을 시작하는 것,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할까요? 


전환점을 지나고 있는 대한민국

전환점을 지나고 있는 한반도가 다시 위기에 처했습니다. 의문 투성이인 진보 정치인의 죽음, 반대파를 말살 시키기 위해 검경과 온오프라인을 동원한 정치적 마타도어, 국민의 뜻을 배반하고 공공 영역의 사유화를 부추기는 정부…

유신 시대를 살았던 이청준 작가가 그 시대의 사회적 타락상을 언어의 타락으로 비유적으로 경고했듯이 사슴을 말이라고 불러도 아무도 이를 바로잡지 않는 사회가 다시 도래했습니다. 

언어가 유린당해서 제 의미를 잃고 있는 현상이 반복되는 현실이 절망스럽습니다. 권력자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식 이하의 행동을 끝없이 저지르고 있어 국민들의 분노가 점점 차오르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기도 합니다. 모든 가능성이 다 없어지기 전에 이런 마음들이 합쳐져 국가가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개인들의 노력은 더욱더 중요해집니다. 사회의 타락에 절망하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는 개인들이 결국 사회의 발전을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진보에 대해 참고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하며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인생의 전환점에 대해

저는 살아오면서 몇 번의 전환점을 겪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전환점은 고교 시절에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평균 등수로 650명 중에서 108등이었으나 고3 학력고사에서 이과 전교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공부라고는 하지 않던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초에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그때부터 학력고사를 치르는 3학년 말까지 미친 듯이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2년의 세월 동안 제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때 읽었던 한 권의 만화책 덕분이었습니다. 

1970년대에 임창이라는 유명한 만화가가 그린 만화책 중에 “잠자는 우등생”이란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만화는 특이하게도 만화가가 늘 주연으로 내세우던 캐릭터가 아닌 조연 캐릭터가 중심인 만화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연을 맡은 만년 조연 캐릭터는 어느 날 아침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난 왜 공부를 못하는 것일까? 나도 공부를 잘할 순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등교한 날 마침 외부 경시대회 출전자를 뽑기 위한 모의 테스트를 했는데 우연히 1등을 하게 됩니다. 찍은 것이 다 맞았던 것이지요. 수업 내용과 무관한 것이라 우등생들의 성적이 나빴던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학교 측은 경시대회 결과나 나쁠까 우려하여 규정을 변경해 그와 우등생을 함께 경시대회에 내보내기로 합니다. 그는 대회에서 창피당하지 않기 위해서 살면서 처음으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삼촌을 찾아가 공부 잘하는 방법을 물어보기도 하고 늘 주연으로 나오던 우등생 캐릭터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요. 만화는 그 과정을 세밀히 묘사하며 그가 한 명의 우등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렸습니다.

어린 나이에 만화를 읽고 감동한 저는 언젠가 제 인생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란 예감을 하고 살았습니다. 아니 그런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네요. 

그러던 중, 고1 겨울 방학 때 아버지가 하는 집안 일을 돕기 싫어 공부한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아버지가 집을 직접 수리하신다고 나서는 바람에 잘못하면 하루 종일 밖에서 중노동을 하게 생겨서 공부를 피난처로 삼은 것이지요.

어쩔 수 없이 방학 내내 방에 갇혀 지내는 동안 할 게 없어서 2학년 과정의 참고서를 읽었습니다. 시험을 대비한다거나 하는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랬는지 소설책 보듯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2학년 초, 실력 평가를 위해 아직 진도도 나가지 않은 2학년 과정의 문제로 시험을 치렀는데 마침 그 부분이 제가 다 읽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반에서 1등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까지 전교 1, 2등 하던 녀석들은 저와 차원이 다른 종족이라고 여겼는데 제가 그 녀석들을 이긴 것입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저를 다시 봤다는 듯 쳐다보던 눈길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몇 달 후 중간고사에서 곧바로 원래의 108등으로 돌아가자, 그러면 그렇지 하며 달라져 버린 눈빛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라해진 제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1등이 되기 위해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잠자고 있던” 우등생은 그 후 2년 동안 “공부란 무엇인가”, “뒤처진 자가 어떻게 앞선 자들을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행 역학을 연구하는 자들은 "말벌은 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말벌은 이들을 비웃듯이 잘 날아다닙니다. 왜 말벌은 날 수 있는 것일까요? 

말벌은 자신이 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훌륭하게 날 수 있는 것입니다.(지그지글라, 정상에서 만납시다)

저는 다시 1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2까지 공부란 것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제가 알던 전교 1, 2등은 늘 공부를 해 왔습니다. 그들은 원래부터 전교 1, 2등이었고 그때도 그랬고 그 이후에도 그럴 것입니다. 

그들은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일어날 줄을 모르지만 저는 십 분만 앉아 있어도 온몸이 뒤틀립니다. 그들은 부유하여 참고서도 풍족하게 구입할 수 있고 과외도 받습니다. 

그들의 부모님들은 선생님에게 때마다 촌지를 보내주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줍니다. 저는 그 당시 늙은 부모님이 고등학교 수업료도 제 때 내주지 못했습니다. 참고서 살 돈도 없었습니다. 

일부 양심 불량 선생들은 다음 시험이 어느 문제집에서 나올 것인지 미리 흘려서 학생들이 그 문제집을 사게 만들고 리베이트를 챙겼는데 저는 그 문제집을 살 돈이 없어서 친구들에게 잠시 빌려 보고는 했습니다. 사 놓고 보기는 싫지만 제가 보는 것은 더 싫어 빌려주지 않으려는 녀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인 공부 시간을 늘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이기는 데 익숙한 녀석들은 같은 시간에 성실한 자세로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정적으로도 평온하고 교우 관계와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있어 오직 공부만 하면 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는 것도 없고, 잘나지도 못한 데다가, 참고서도 제대로 못사는 가난하고 변변찮은 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전교 1등을 이겨보겠다고 극성을 떠는 바람에 성적 비슷했던 친구들의 질시와, 공부 잘하는 녀석들의 따돌림을 받는 열악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저를 배제하는 그룹이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1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여러 가지 여건들로 볼 때 1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던 고3 가을의 어느 날, 밤 9시경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도중 정전이 되었습니다. 오 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교실은 의자가 날아다닐 정도로 난장판으로 변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학생들은 잽싸게 집으로 날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어둠 속에서 생각했습니다. “아, 오늘 치 분량 다 끝내야 하는데….”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공부에서 아무도 저를 이길 수 없을 것이란 것을….

이런 노력의 결과로 결국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군대 빠지는 방법이 수백 가지이며 군대 가는 놈을 바보라고 여기던 공대에서 돌멩이 던지느라 신경을 안 쓰는 바람에 영장이 나와 현역 30개월을 꽉 채우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미 대학 동기 놈들 사이에서는 컴퓨터 제일 못하는 놈으로 찍혀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학교를 떠났다 다시 들어오는 등 오랜 시간을 허비한 후, 턱걸이 성적으로 겨우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9년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한 후 저는 오랫동안 집에 처박혀서 리눅스를 혼자 공부했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리눅스란 무료 공개 운영체제에 빠져 취직이고 뭐고 생각도 못 하고 긴 세월을 리눅스 파는데 보낸 것이지요. 

가망 없는 7년이 지난 후 IMF가 왔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찬 바람 부는 벤처를 시작하면서 비싼 유닉스 서버 살 돈이 없어서 값싼 대체품인 피시 서버와, 공짜 운영체제인 리눅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리눅스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더구나 거의 10년 동안 리눅스를 준비하고 있었던 컴퓨터 전공자는 정말 희귀했습니다. 때문에 제가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벤처 붐 초기에 검색 포털인 엠파스 사이트 전체를 완전히 리눅스로만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싼 유닉스 서버가 아닌 값싼 리눅스 서버로도 대형 사이트를 훌륭히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비싼 서버 비용 때문에 운영할수록 적자가 나던 포털들이 엠파스의 성공 사례를 보고 다들 리눅스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에 컴퓨터를 가장 못하던 녀석이 갑자기 한국의 리눅스 최고 전문가로 등장하자 당황스러워하던 그 당시 대학 동기 녀석들의 표정이 기억납니다. 이건 마치 중학교 때 공부 잘하던 녀석들을 우연히 서울대학교에서 만났을 때 “우리 학교에 무슨 일로 놀러 왔냐?“라고 묻던 기억과 겹칩니다. 그들은 제가 감히 자기들이 다니는 대학의 학생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물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엔지니어로서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포털 사이트 구축을 도와주기 위해 데이터센터에서 밤을 새우며 노력하는 동안 경영을 한다는 자들은 이리저리 회사 돈을 유용하고 온갖 명목으로 횡령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벤처 거품이 꺼지고 난 후에 제게 남은 것은 밤새우며 기계와 지낸 기억밖에 없었습니다. 재미는 있었지만 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일입니다. 구글보다 더 큰 사이트를 만들어서 초대규모 서버군을 조화롭게 돌려 볼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는 그런 기회를 다시 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전환점을 지난 후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공부와 컴퓨터, IT와 벤처, 그 후 하드디스크를 대체할 반도체로 만든 저장장치인 SSD까지 손을 댔지만 정말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벤처 거품이 꺼진 이후 새로운 사업을 하자는 제안들을 뿌리치고 제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거의 7년 동안 저는 한 가지 주제를 구상하고, 그것의 체계를 잡고, 글로 완성해내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 인고의 세월을 거쳐 이제 저는 제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글쓰기 훈련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글이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오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글의 소재 또한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쓴 많은 글이 거의 다 묻혔지만, 한국 IT의 문제점을 알린 “한국 IT산업의 멸망”은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 책을 낸 이후에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고 저 또한 크게 달라졌습니다. 

불공정한 거대 포털과 싸웠고, 디지털포렌식 기술로 막강한 국가 기관의 부정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지난 몇 년의 경험에 비춰볼 때 엔지니어가 엔지니어로만 남지 않는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것 같습니다. 

IT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고찰하고, 이를 알기 쉬운 글로 알리며,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잘 만든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지만 잘 쓴 글은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제가 프로그래밍 언어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그만두는 대신, 인간의 언어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제 인생의 세 번째 전환점을 지난 이후의 삶은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 더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이 사람들의 생각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달라지게 만드는 놀라운 경험도 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남들 위에 군림하거나, 부를 거머쥐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줍니다. 저는 이런 삶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탐험해 볼 생각입니다.


내 인생의 화두

저는 “뒤처진 자가 앞서가는 자들을 이기는 법”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고 믿습니다. 제 블로그에 원고지 2만 매가 넘는 글이 있는데 소재는 다르지만 결국 이런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예정입니다. 

제가 인생을 걸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부”에 대한 것입니다. 제 블로그에는 이미 “맥주병이었던 중년의 아저씨가 바다 수영을 하는 이야기”나 “담배에 쩔어 있던 중독자가 스스로 담배를 끊는 과정에 관한 독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보다 더 지독한 공부 이야기를 언젠가는 들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와 리눅스를 거쳐 다시 십 년이 지나 저는 “글”이라는 제 인생의 가장 큰 화두를 푸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현재 오래도록 연마한 글쓰기라는 촉과, 긴 세월 동안 체득한 IT 지식을 활용하여 사회가 올바른 길로 가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뭐하냐고 묻는 친구놈에게 IT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더니 갑자기 굽고 있던 삼겹살을 제 앞으로 몰아 주며 많이 먹어라고 하던 친구놈의 표정이 생각납니다.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돈 벌 구멍이 널리고 널린 IT 분야를 마다하고 책을 쓴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했을까요? 아마 저도 그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 후 그 친구는 제가 IT 비평서로 나름 매스컴을 타니까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태도가 바뀌더군요. 황혼기에 접어든 후 돈과 권력보다는 글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은 친구들은 저의 인생 이모작을 진심으로 부러워하곤 했습니다.


김인성의 크리스마스 선물

혹시 뒤처져 있던 제가 남들을 앞서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하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제가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언제나 오늘 하는 일이 내일의 꿈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삶이 급하고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의미한 일을 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따뜻하고 안락한 곳보다는 찬바람 부는 곳에 있어야 정신이 깨어난다. 하고 싶은 일에 인생을 걸어라. 악착같이 노력하라.”

저는 이런 단순한 원칙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을 알고 있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것을 자각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비결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총론으로는 위대할 수 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게으르고 한심한 존재일 뿐이니까요. 때문에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각을 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벗어난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술과 같은 도피처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맑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멀리 여행을 떠나라고 말하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생각하며 걷기도 괜찮습니다.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연속된 시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저절로 자신에 대해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을 참선이라고 부르며, 그 끝에서 깨달음과 득도의 찰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성령 받는 것이며 성불하는 것입니다.

득도의 찰나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대리니까 딱 그 분수에 맞게 행동하고 사고해 왔던 것에서 벗어나 “이 빌어먹을 회사의 지향점은 뭐야? 이 회사 대표란 자는 왜 이따위로 밖에 못하는 거야?” 이런 건방진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갑자기 부산에서 일이 생겼네? 회사에 중요한 일이니까 부산까지 이동하려면 회사에 헬기를 요청해야겠어”, 이 정도의 용감함도 생깁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가 이태리에 출장을 좀 갔다 와야 되겠어, 회사에서 안 보내주면 내 돈으로라도 갔다 오지 뭐.” 이런 황당함을 동반한 굳건한 믿음도 그 한 종류입니다.


현실을 벗어난 시간을 만드셨나요? 여행을 떠나셨나요? 득도의 찰나를 경험하셨나요? 

“내가 인생에서 정말 성취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 이 화두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나요? 


멀리 갈수록, 먼 미래를 상상할수록 인간은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당신은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장애물이 없어지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거대한 가능성을 가진 한 인격이라는 것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것에 당신의 인생을 거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변화가 결국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내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늦지 않았다. 당신은 위대하다. 당신 스스로 이 사실을 자각하라. 그것을 진실로 깨달을 시간을 만들어라“

김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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