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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꺈느 영화 1등상 수상에 빛나는 봉준호의 기생충이 불편한 분들에게 본문

창작자의 나라

꺈느 영화 1등상 수상에 빛나는 봉준호의 기생충이 불편한 분들에게

미닉스 김인성 2019. 6. 3. 23:57

역시 꺈느! 어느 [기생충] 가족, 뒤틀리고 기괴한 132분짜리 베드 테이스트

 

스포 주의 : 이 글에는 기생충, 플란다스의 개, 마더, 설국열차, 올드보이, 박쥐, 아가씨, 스토커, 섬, 어느 가족, 패왕별희의 스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봉준호 영화가 불편하다.

 

올드보이 감독 박찬욱은 B급 정서가 넘치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의 정서는 관객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작품으로 등극한 영화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복수는 나의 것"처럼 처절하게 외면 받은 영화가 더 많은 것이 이 때문이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여기가 웃음 포인트인데 왜 극장에서 사람들이 웃지 않을까? 왜 내 유머는 잘 안 통하는지 모르겠어." 박찬욱은 코멘터리에서 언제나 이런 고민을 털어 놓는다.

봉준호의 영화도 소위 말하는 B급 쟝르영화에 속한다. 비주류적인 감성으로 이 사회를 비틀고 비아냥거리는 그의 영화는 루저들이 잠시만이라도 주류를 비웃으며 낄낄댈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주운 개를 보신탕으로 삶아 먹는 경비원, 아들 친구랑 섹스를 하는 엄마, 어두운 무덤 가에서 여자 팬티로 자위를 하는 용의자, 똥물이 쫙쫙 역류하는 변기 뚜껑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딸...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봉준호의 영화가 불편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부조리한 삑싸리 유머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여태까지 불편함을 참고 그의 유머를 따라왔다. 하지만 엄마가 처 먹여 주는 한약을 마시면서 동시에 오줌을 누는 원빈의 모습(마더)을 클로즈업으로 길게 보여주는 장면부터 영화적 재미보다는 불편함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 불편함이라는 것이 나에게 망각의 침으로 작용한 것일까?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기억을 떨치려 애쓰는 엄마의 모습만 남고 영화 마더의 후반부가 통째로 머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소재가 영화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설국열차에 대해 봉준호가 "밖에서 보면 거대한 남자 성기, 안에서 보면 길고 긴 여자 성기를 찍을 수 있는 영화라서 엄청나게 흥분했다"라고 말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왜 그의 영화가 불편했는지 이해했다. 

봉준호는 좀비를 체인톱으로 갈아버리는 베드 테이스트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B급 감독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특별한 사회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영화에 담아내는 사회 풍자는 그 자체가 유머의 요소일 뿐이다. 그는 자신만의 악취미적인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악취미 가득한 영화를 낄낄대며 만들고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그의 태도에 대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제시하는 것들을 우리가 억지로 신비화할 뿐 봉준호는 사회 비판을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영화 기생충은 상류 계급과 하류 계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기생충의 고급 저택 주인은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나 권력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최근 몇 년 동안 남편 사업이 잘 되어서" 좋은 집에 살고 있을 뿐이다. 

반지하 가족은 하층 계급이 아니다. 한국에는 계급이 없다. 자녀들은 충분히 교육 받았고 입시에 실패하긴 했지만 충분히 인텔리이며 고급 주택에 가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반지하 가족의 아들은 고급 주택을 소유할 꿈을 꾸는데 거기에 필요한 것은 돈 뿐이며, 그것은 성공을 통해 획득 가능하다.

(물론 어떤 사회든지 극소수만이 소유할 수 있는 이 비싼 고급 주택만 꿈꾸지 않는다면 반지하가 아닌 번듯한 집을 소유할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돈으로 구분되는 계급적 차이는, 인도의 신분제도나 유럽의 귀족 제도에 비하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지하 가족은 고급 주택 집 주인들에게 월급을 받기 위해 고용된 것일 뿐,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행동 양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선생으로 포지션한 아들과 딸은 사모님으로부터 깍뜻한 대접을 받을 정도이다.

기생충에서 계급적 차이일 수 없는 관계를 억지로 계급간의 대립으로 설정함으로써 영화의 리얼리티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체가 우화로 보인다. 영화의 모든 집들을 완벽한 세트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어디 가면 맡을 수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려주기 전에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냄새 따위로 서로의 차이를 구분할 뿐이다.  

더구나 반지하 가족이 이 집에 들어오는 행위 전체가 범죄로 구성되어 있다. 문서 위조, 학력 위조, 운전사 모함, 알러지 환자에게 알러지 물질 투여, 이전 기생충 가정부 살해, 감금... 이 끝없는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냄새난다고 흉봤다는 이유로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것이 과연 계급간의 대립의 해결책인가? 집 주인은 정말 죽을 죄를 지었는가?

 

기생충은 내러티브가 치밀한 영화가 아니다

 

건강한 4명의 가족이 생계를 위해서 하는 일이 기껏해야 박스 접기이다. 왜 그들이 그런 일 밖에 할 수 없는가? 보증을 잘못서서 일해도 갚지 못할 빚이 있다거나 취업을 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인터넷 사용료를 낼 돈도 없는 것으로 보아 사기를 치든 막일을 하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생활비 이상을 벌지 못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런 무능력자들이 고급 주택에 침투할 때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영화보는 내내 기막힌 사기술을 가진 가족이 왜 반지하에서 이 꼴로 살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진짜로 영화를 보면서 "사지 멀쩡한 가족이 왜 반지하에?", "사기칠 능력이 있으면서 왜 반지하에?", "이전에 사기를 쳐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완벽한 설계와 실행 능력이?" 이런 의문이 맴돌아서 초반에 집중이 어려웠다.

설정을 위한 설정, 영화의 목적을 위해 끼워 맞춘 게으른 설정에 따라 그들은 "반지하에서 열심히 궁상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는 고급 주택에 사는 가족을 완전히 속여 먹는 기생충 같은 가족이라는 블랙 코미디가 밝은 톤으로 빠르게 연출된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를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서 갑자기 완전한 스릴러로 변형된다. 이런 수습은 비겁하다. 이전에 아무런 복선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집 주인 남자는 아줌마가 2인분을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또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줌마가 많이 먹을 뿐임이 밝혀진다.)

더구나 갑작스런 전환을 만들기 위해서 "주인도 없는 집에서 난장판을 벌이던 고용인들이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럴 필요도, 그럴 이유도, 그래서도 안 되는 일, 즉 이전 가정부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 준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나는 반지하 가족의 선택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밝은 대낮에도 이유 없이 낯선이에게 문을 열어줄 고용인은 없다. 자신들이 안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문을 열어주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 어떤 고용인도 집 주인의 허락 없이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문을 열어줄 수 없다.

위대한 영화 감독과 대 배우의 영화는 이 간단한 세상의 법칙을 위배하고 말았다. 사실 꺈느의 후광만 아니라면 쟝르 영화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을 가며,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하는 설정은 흔한 것이다. 하지만 봉테일의 영화라면 이런 식의 게으른 설정은 가열차게 까여야 한다. 

뛰어난 설계로 집을 점령한 기생충들이 왜 갑자기 이렇게 무력한 저능아로 돌변한 것일까? 꺈느의 광풍이 지나가고 나면 이런 부분에 대해 반드시 비판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비판을 누가 하냐고? 그건 당신들이 해야지. 지금 봉중호, 송강호, 꺈느 빨기에 정신이 없는 당신들, 십쩜 만쩜에 백쩜!, 봉준호 만세! 꺈느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외치고 있는 영화 평론가 당신들 말이야.

그 이후의 스릴러는 불 켜면 사라지는 바퀴벌레들과의 숨바꼭질 놀이로 돌입한다. 납득되지 않는 개연성 없는 장면 이후의 활동 사진이 무슨 감흥이 있겠는가? 영화는 예측대로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전개되다가 황당하게 끝난다. 

그럼에도 영화는 악취미 가득한 설정으로 관객의 머리를 휘저 놓는다. 여지없이 봉준호의 베드 테이스트가 작렬하는 장면들이 등장한 것이다.

봉준호는 계급 우화를 수습하기 위해서 장마에 침수된 반지하를 후반부에 도입했을까? 아니면 똥물 쫙쫙 뿜어져 나오는 변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밝고 경쾌한 전반부를 설계했을까?

나는 기생충 후반부를 보면서 지구를 지켜라를 볼 때처럼 극장에서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나가고 싶었지만 중간 좌석이라 움직일 수 없어 나오지 못했다. 이것은 백프로 진실이다.

 

선을 넘는 냄새에 대하여

 

기생충의 냄새 설정은 봉준호가 선을 한참 넘어 인간 사회의 이면을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린 것이다. 하지만 이 늪에서는 봉준호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다. 

내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들, 내 뇌를 파고들어 영혼에까지 각인된 기억들도 냄새와 관련된 것들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갔던 잔치집에서 먹었던 오래된 정부미 밥, 그 때 나왔던 한상 가득한 요리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한 숟가락 떠 먹은 밥에서 나던 퀴퀴한 냄새 그리고 벌레 반쪽을 잘라먹은 듯한 기이한 맛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다.

나는 그 때 그 맛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열심히 한 공기를 비웠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가난의 냄새였으며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임을, (나 또한 가난한 집안이었으므로) 그 어린 나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쌀은 좋은 것을 먹어라"는 충고 조차도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충고도 독으로 작용할 뿐이다.

살아오면서 나에게 "오늘 입냄새가 좀 나는 것 같네"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결코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말을 한 순간 그는 나를 입냄새나는 인간으로 확정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떠올릴 때면 불쾌한 냄새가 함께 연상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거꾸로 그 사람이 입냄새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에 나에게서 나는 냄새를 언급한 자는 결국 나의 치부를 들쳐본 자로 영원히 낙인찍히고 만다.

사실 봉준호, 송강호의 나이라면 한가하게 지하실 냄새 따위를 거론할 때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노인 냄새를 포함한 온갖 냄새를 풍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구취의 끝판왕이라는 편도석은 없는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혹시 담배를 핀다면 지금 이순간에도 그들은 역한 담배 냄새를 풍기고 다닐 것이다. 특히 담배를 피면서 봉지 커피까지 마신곤 한다면 아무리 대 배우, 꺈느 봉이라도 달짝지근하면서 지독하게 더러운 아가리 똥내가 나는 법이다. 

집 주인 부부가 소파에 누워 기생충 가족의 냄새를 거론하는 장면을 찍은 현장은 아마,

야간 촬영으로 피곤에 찌든 배우의 입내,

밤낮 없이 연출 고민에 시달리는 감독의 짠내,

인공비 뿌려대는 축축한 공간 속에서 무거운 조명과 카메라를 운영해야 하는 스텝들의 땀내,

그리고 식후 연초와 봉지 커피로 인한 아가리 똥내가 진동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꺈느의 선택을 받음으로써 이런 냄새가 다 가려질 것이란 점이다.

봉준호는 더 이상 평범한 감독이 아니며 송강호는 연기의 신으로 등극했다. 앞으로 아무도 이들에게서 아가리 똥내를 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밥 먹으며 예술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입에서 밥알이 튀어 나와도 아무도 이를 지적하지 않을 것이다. 꺈느 봉의 입에 있던 고추가루가 밥상 위 찌개에 튀어 들어가고, 대배우의 침이 모든 반찬에 고루 분사되더라도 상대방은 그들의 예술혼에 감동한 채 똥내나는 반찬을 맛있게 집어 먹을 것이다.

꺈느의 선택을 받았으므로 이후에 더욱 더 겸손해지를 바란다. 당신의 입냄새가 선을 넘었다고 말해주는 사람, 당신이 꺈느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동성애와 근친상간의 기괴함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 이를 온 몸으로 막아서는 사람, 당신이 미투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신독을 요구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꺈느란 향수가 당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잠깐 못 맡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예술을 위해서 합의하지 않은 일을 배우에게 시키거나, 혹시라도 술 먹다가 상대에게 무례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돈이든, 성적인 일이든, 폭력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든, 혹시 미투가 될 일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당사자와 잘 해결하기 바란다. 당신이 말했듯이 냄새는 선을 넘기 마련이니까.

 

역시 꺈느, 똥물에 주목하는 베드 테이스트!

 

다시 말하지만 나는 봉준호의 영화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봉준호는 보여지는 이면에 또 다른 내러티브를 담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점점 더 불편해지고 있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재미있게 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하지만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꺈느가 이 영화에 주목함으로써 그의 B급스러운 감각이 더욱 더 뒤틀리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마약과 쾌락에 찌들어 근친 상간마저 시들해진 유럽 귀족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분한 장면은 변기에서 똥물이 분수같이 쏟아지는 장면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꺈느의 귀족 노친네들이 화면 가득히 쫙쫙 솓구쳐 오르는 똥물을 보며 분명 오르가즘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이다. 그들이 오래오래 기립 박수를 친 것은 간만에 맞이한 오르가즘을 좀 더 오래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꺈느의 유럽 귀족들은 정통적으로 아시아 영화에서 뒤틀리고 그로테스트한 요소들에 엄청난 집착을 해 왔다. 올드보이가 그토록 상찬을 받은 이유는 근친상간이 주요한 양념으로 곁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꺈느의 선택을 받은 박찬욱은 그 후 점점 더 기이한 영상을 화면에 연출하고 있다. 삼촌과 엄마 그리고 삼촌과 딸의 섹슈얼한 관계(스토커), 섹스 읽어주는 여자와의 노골적인 레즈비언 섹스(아가씨),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기이한 화면 그리고 타락한 신부(박쥐)...

홍상수 영화 역시 상을 받을수록 인물들이 더욱 더 찌질함의 극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현실 색마 김기덕이다. 동성애를 탐닉하느라 똥꼬 다 헐어버린 유럽 노친네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보지에 낚시 바늘을 넣고 힘껏 당기는 장면까지 연출한 김기덕에 이르면 상을 미끼로 한 꺈느의 악취미가 얼마나 고약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기생충을 한 사회의 계급 구조에 대한 풍자라고 읽는 것이 가능하다면 좀 더 대상을 넓혀 서구 사회와 그들의 식민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영화로 볼 수도 있다. 유럽에 무단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난민들, 경제적인 침공을 일삼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공포로 읽을 수도 있다.

착하고 선한 유럽을 더럽히는 아랍 난민들, 유럽 시장을 위협하는 아시아 상품들, 어떤 악성 코드가 심어져 있을지도 모를 화웨이 장비들이 싸다는 이유로 유럽을 초토화하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그들이 아시아의 영화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아시아 인들은 도덕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인륜을 파괴하며 돈 밖에 모르는 인종들임을 아시아인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며(2018년 꺈느 황금종려상, 일본 영화, 어느 가족),

아시아 사회가 동성애자 전통 예술가에게는 끝없는 핍박만이 존재하는 사회임을 스스로 고발하는 것이다.(패왕별희)

그들은 아시아 인종들이 아무리 기어올라오더라도 온몸에서 내뿜는 더러운 냄새는 결코 없앨 수 없는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아시아인의 입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서 기생충에게 최고상을 주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인도의 갠지즈 똥물과 함께 남한의 변기 똥물 분수가 아시아 명물로 등극할지도 모르겠다. 가능하면 서울 시청 앞에 커다랗게 만들어 인기 관광 상품화 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아시아 영화에서 기가막히게 동성애와 근친상간 코드를 발견함으로써 유럽의 퇴폐적인 전통이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임을 인정 받으려는 욕구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근친상간 코드를 발견하는 것일까? 그들을 위해 아시아의 예술 영화인들이 근친 상간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잘모르겠지만 적어도 꺈느가 이런 그로테스크한 부분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당신도 봉준호 영화에 불편해해도 된다

 

봉준호의 영화는 불편함을 특징으로 한다. 봉준호의 영화는 악취미가 가득함에도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재기발랄하고 재미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내가 불편한 것은 또다시 이런 불편함을 굳이 꺈느가 선택했다는 점이다. 꺈느 이후 봉준호의 영화는 어떻게 변모할까? 나는 봉준호의 영화가 꺈느의 귀족 노친네들의 노리개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이 정상적인 아시아인이라면 꺈느가 선택한 아시아 영화들에게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봉준호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정상적인 사회인이라면 봉준호 영화를 불편해하지 않고 즐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한의 모든 영화 평론가가 극찬에 극찬만을 남발하고 있는 중이라 자기 돈 내고 영화 보고 나서 불편하게 느끼는 관객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영화의 장단점을 용감하게 말하는 평론가 하나 없는 폭력적인 사회 분위기에 저항하기 위해서 나는 이 글을 쓴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꺈느란 권위의 외피가 입혀진 영화라고 하더라도 당신의 느낌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요구되는 것이다.

나는 봉준호 영화가 불편하다.

그럼에도 나는 봉준호 영화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불편함을 콕찝어 선택한 꺈느로 인해 나는 기생충에 이전보다 훨씬 더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최고상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새디즘 충만한 유럽 귀족들의 눈높이가 아닌 우리들을 위한 예술에 눈을 돌리도록 하자.

김인성.

 

내가 글에서 꺈느라고 쓰는 것은 칸도 아니고 깐느도 아니고 꺈느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한국 평론가들에 대한 비아냥이다. 비슷한 경우로 캬메라가 있다.

이 글을 씀으로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쏟아지는 비난과 비아냥 그리고 줄어드는 팔로워와 수 많은 악플 뿐이다.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힘든 사회라서 너무 힘~들~어~요~ 졸라졸라졸라졸라~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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