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추석에 꼭 보여 주고 싶은 영화 한 편 본문
이글은 영화를 통째로 보여주는 극악의 스포일러 문서입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 중에서 이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기를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2. 길 위의 날들
이미지 출처: http://blog.naver.com/cgsyndrome/110016922577
이 작품은 감옥에 갇혀 있다 짧은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한 죄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은 죄 때문에 자유를 반납하고 살아야 하는 죄수에게 있어 바깥 세상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겠지요. 그러나 십오 년이란 형기는 한 인간을 현실과 단절시키기에 충분한 세월입니다. 그 정도 시간은 이전의 삶을 추억으로 만들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생을 시작해야만 하게 만듭니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격리된 시간만큼이나 사람들과도 멀어지고 관계도 끊어집니다. 십오 년의 감옥 생활은 한 인간을 죽이고 강제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깥 사람들은 일상을 살면서 관계를 변화시켜 나가지만 갇힌 자들은 영원히 정지된 시간 속에서 기억의 조각들을 반복적으로 꿰맞추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시간이 길수록 현실과는 더 멀어지지요. 세월이 지나버리면 관계는 결코 복구되지 않습니다. 아내는 도망가고 아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있어, 어머니만은 긴 시간을 뛰어넘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오 년 형기를 십 년째 성실히 채우고 있는 죄수에게 어느 날 사흘짜리 휴가가 주어집니다. 그때 그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우리의 영원한 의지처인 존재, 바로 엄마를 만나러 주인공은 달려 갑니다.
이미지 출처: 길 위의 날들 비디오 캡쳐, 이하 동일
“길 위의 날들”은 몇 개의 소설에서 작은 에피소드들을 따와서 만든 드라마입니다. 휴가를 다녀오는 죄수의 행적을 따라가며 이런 에피소드들을 잘 버무려 놓았습니다. 십 년 만에 세상에 나온 죄수는 세상을 그저 바라볼 뿐 입니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니까요. 드라마라는 장르는 우리가 사는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단절되어 있다가 세상을 다시 관찰하게 되는 죄수의 눈도 우리의 일상을 다르게 느끼게 해 주지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자면 지나간 이런 드라마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 주며 우리를 잠시 추억에 잠기게 함으로써 또 한 번 우리를 뒤돌아 보게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에 대해 우리가 좀 더 깊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들이지요. 문학과 예술, 깨달음과 감동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V는 알지 못할 화면을 내보내고 있고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TV를 쳐다볼 뿐입니다. 그들에게 시간은 지겹게 흐르지 않아서 힘겹게 소비시켜야 할 것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십 년 동안의 기다림, 죄수에게 주어진 단 며칠 간의 휴가라는 이야기는 80년대 욜(yol)이라는 터키 영화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욜은 여러 명의 죄수가 동시에 휴가를 떠나고 그들의 이야기가 각각 나뉘어져 있으며 좀 더 다양하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배신한 아내를 벌주기 위해서 산을 넘다가 눈 위에 버린 후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아내가 안쓰러워 다시 그녀를 업고 산을 내려가는 에피소드가 기억납니다. 그녀는 끝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남편 등에서 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터키의 현실을 고발한 반체제 영화로 소개되었지만 저는 시한부 인생들이 찰나적인 삶 속에서 느끼는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미움에 대한 묘사가 더 와 닿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이 영화는 좀 더 동양적이고 좀 더 단순합니다. 자동차 대소동과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도 없고 욜과 같은 뭔가 특별히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사는 절제되어 있고 사건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주인공을 따라가는 우리들은 그저 익숙한 시간 속에서 일상적인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피 같은 시간을 객지에서 보내야 하는 그가 안타깝습니다. 그의 귀향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짜증이 납니다. 욕이 저절로 나옵니다.
아무 것도 그의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TV는 여전히 무심하게 운동 경기를 중계해 주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난 십 년 동안 날마다 했던 것처럼, 잠들지 못하는 그는 어둠 속에서 세상에 대한 원망을 삭히며 조용히 새벽이 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언젠가 평택에 살 때, 서울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막차를 놓친 적이 있었습니다. 영등포에서 평택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가 떠난 후에 시외버스를 포함해 모든 교통편이 끊겼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갑자기 너무나 집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억지로 택시를 타고 가거나 친구한테 연락해서 태워달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데 그렇게 무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결국 평택 행을 포기하고 후배 자취방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익숙해있던 식구를 타의에 의해서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아쉬움이란 너무나 컸었지요.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 기억을 떠올라 절절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잠시도 낭비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지나고 보면 그 깊이만큼 인간적인 성숙을 하게 됨을 알게 되지만 당시에는 이런 말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드디어 고향 마을 어귀에 도착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눈 덮인 지름길을 달려 마지막 언덕을 숨차게 올라 갑니다. 저 멀리 보이는 고향 집.
오랜 세월 동안 꿈꿔왔던 고향 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 지난 세월 그는 이 순간을 꿈꾸며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말 없이 그냥 서있을 뿐입니다. 수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시간을 절제된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는 장면. 저에게는 뼈에 사무쳐서 영원히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장면이 되었습니다.
다들 어디 갔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소들은 외양간에서 무심히 쉬고 있고
뒷마당 장독대에도 눈만 쌓여 있을 뿐입니다.
따뜻한 부뚜막에 앉아 솥을 열어보니
정상적인 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병이란 특이한 상태를 통해 정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만 평화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흔해빠진 일상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이렇게 자유를 박탈 당한 죄수들의 바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끝끝내 호들갑을 떨지 않고 조용히 그를 따라 갑니다. 따뜻한 부뚜막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리며 감자를 먹습니다. 지금이 그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과거의 고통들을 잊게 해주는 순간입니다. 이젠 다 괜찮습니다. 고향에 왔으니까. 그토록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까. 삶이란 이렇게 단순한 것임을, 그는 조용히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순우야, 니가 정말로 나왔구나. 나왔어”
“나는 괜찮어. 아직 아픈 데도 없구, 니나 좀 몸이 성해라”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영원한 우리의 어머니, 배우
어렵게 집에 돌아와 일상 속으로 들어왔으나 앞으로 오 년이란 긴 시간을 더 복역해야 하는 그에게는 신기루 같은 시간일 뿐입니다. 현실에 발을 디딜 수도 어떤 약속을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눈 앞에 있는 존재들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오 년 후에 살아 있을지도 의문인 어머니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합니다. 십 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여주지 못한 아들이 오 년이 지나면 청년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런 시간 동안 여전히 그는 아버지로서 부재중일 뿐입니다. 어쩌면 달아난 아내처럼 어머니는 세상을 떠버리고 아들은 그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죄만을 기억하며 맺힌 응어리를 풀지 않고 있습니다. 술 한 잔 나누는 이상의 관계 회복도 불가능합니다. 아직도 고향은 죄지은 그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형기를 마치면 지금 만나고 있고 보고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휴가를 떠났을 때의 그 기대는 막상 고향에 온 순간부터 고통스러운 추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앞으로 오 년 동안 다시 오늘의 기억을 되씹으면서, 이 기억 속의 존재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새벽에 깨어난 그는 이런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또 다른 번민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군대 시절 여러 번의 휴가를 갔다 왔지만 그 때마다 기억나는 것은 즐거웠던 민간인들과의 시간이 아니라 복귀하기 위해 되짚어 와야 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휴가란 복귀 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기차 안에서 핀 담배가 나를 절망시키고 어둡고 냄새 나는 내무반이 나를 절망 시키고 시커먼 고참과 쫄따구들의 후줄그레한 난닝구 복장들이 나를 절망 시켰습니다. 차라리 휴가를 가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현실감이 생기지 않아 도저히 다시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굴 속 같은 내무반에서 앞으로 수 백 일을 더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여러 번의 휴가를 거쳐서 저는 길들여졌고 고참이 되었으며 더 이상의 절망도 낭만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군 생활에 익숙해진 말년 시절, 제대가 가까워지면서 눌렸던 가위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안정된 군 생활을 흔들어 놓는 휴가는 언제나 설레기는 하지만 한 편 저를 절망케 하고 고통 속에 빠뜨렸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차라리 십오 년 동안 한 번의 휴가도 없이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이렇게 절망적인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부푼 기대는 깨어지고 고통과 안타까움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합니다. 남은 시간들은 조바심 속에서 살아가야겠지요. 그에게 있어 이런 휴가가 과연 의미 있는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영화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어둠 속에 홀로 앉은 그를 담담히 보여 줄 뿐……
귀향과 복귀라는 주제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수 많은 예술에서 변주된 이 주제는 여행과 다르지 않은 우리의 삶을 반추하게 해 주기 때문이겠지요. 자동차 대소동이 고향에 닿음으로써 그 이야기가 끝난다면 이 영화는 그 다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닐페이지의 집이 화려했기 때문에 감동적인 것이 아닐 것입니다. 죄수의 고향이 그저 가난한 농촌 마을에 불과했다고 감동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고향과 가족 그리고 어머니는 그 모습이 어떻든 언제나 그립고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로드무비의 한 전형인 이 영화를 재분석하고 그의 여행을 다시 한 번 스크린에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길 위의 날들은 당신이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 한 번은 보게 될 영화입니다. 휴일 저녁이나 명절 날 밤에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낯 선 곳, 여관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텔레비를 통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며 이 영화는 그 길의 의미를 알려줄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이 영화가 나왔을 때 언젠가 누군가가 추천했었다는 기억이 떠오르신다면 채널을 버라이어티쇼로 돌리지 마시고 잠시나마 그의 여행에 동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통이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는 한가지 방편이라면 이 영화보다 더 우리들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알게 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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