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멀리, 더 멀리 가고 싶다. 본문
멀리, 더 멀리 가고 싶다.
나는 언제나 멀리 가는 꿈을 꾼다. 서울에서,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벗어나고 싶다. 2014년에서 벗어나 2024년, 2044년 아니 2144년으로 가고 싶다. 내가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곳, 이 현실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수록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게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한강변을 오래도록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인라인을 타고 팔당까지 왕복하거나 아예 자전거로 한계령까지 갔다 와도 좋을 것이다. 목포로 홀로 떠나는 자동차 여행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내킨다면 진도까지 아니 팽목항까지 가 볼 것. 운전대를 잡고 앞만 바라보며 딴짓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저절로 현실에서 초월하여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다.
어떤 방법도 상관없지만 디지털 기기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네비게이션의 DMB, 라디오, 팟케스트는 꺼두어야 한다. 간단한 음악은 상관 없지만 시끄럽고 장황한 음악은 방해만 될 뿐이다. 중독자 입장에서 말하자면 딱 스마트폰 없이 지내는 시간만큼만 생생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목적지도 없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 혼자만의 시간, 길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여행이어야 한다. 컴퓨터, 텔레비전, 스마트폰, 인터넷으로부터 벗어나 묵언 수행자처럼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게 바로 도를 닦는 것이다. 제대로 된 수행이라면 뭔가를 깨닫는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긴 시간을 소모해야 얻을 수 있는 찰나의 순간, 그 고양된 깨달음의 순간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다, 열반에 이르다, 성령을 받다, 도가 통하다, 철이 들다… 그 순간을 부르는 많은 말이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뒤돌아볼 수 있고,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 가능하며, 꼭 해야 할 것들이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을 되살릴 수 있다. 그 때 인생을 관통하는 화두에 대한 답을 알게 된다면 나머지 삶을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다. 당신도 이 위대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멀리 갈수록 생각은 점점 거창해진다. 서울만 벗어나도 일상에 매몰되었던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자각할 수 있다. 제주도까지 가면 아마 내가 속한 회사나 조직을 최고 책임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뒤돌아보게 될 것이다. 한국을 벗어나 일본으로 간다면 우리나라의 한심한 현실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하게 된다. 공항에 걸린 거대한 한국 기업의 광고판 앞에서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광활한 중국 땅에서 그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고 나면 나라 걱정에 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이국 땅에서 애국가를 들었을 때 기쁨인지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저절로 흐르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씩 하지 않는가?
아시아를 넘어 지구 반대편으로 간다면 사고는 더욱 더 넓어진다. 이 때쯤 되면 남북한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남한 출신의 친북 인사, 북한 출신의 전향 인사, 그냥 북한 사람, 조선족 등 다양한 출신 성분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짬뽕이 되어 살고 있다. 그들의 사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나 일차원적인 행위다. 까마득히 떨어진 한반도가 너무나 작아 보이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 개미들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다. 북한과 남한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북한이 남한이고 남한이 북한이다. 권력이 세습되는 것도 똑같고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물을 외면하는 것도 똑같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국민들의 사상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일 벌레처럼 부려 먹는 것은 결국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사상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는 유럽의 하늘 아래서 다양한 우리동포를 만나다 보면 단순히 좌익인지 우익인지 여부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깨닫게 된다. 종북이란 단어로 사상검열을 하는 것이 민족적 차원에서 죄악이란 것도 알게 된다. 남한 사람들은 종북을 해야 하고 북한 사람은 종남을 해야 한다. 서로를 알고 이해해야 합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겠는가?
종북의 문제는 남한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함으로써 세계에 통할 보편적인 인간상을 추구할 기회를 박탈한다는데 있다. 보수를 넘어 수구, 수구를 넘어 극우적인 주장만이 허용되는 남한에서 세계적인 예술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로운 창작을 추구한다면 사회적인 비난을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목숨까지 반납해야 할지도 모른다. 한국 창작자들의 비극적 현실은 이미 사고 자체가 극우적이라 목숨을 반납하더라도 내재화된 극우적 사고의 틀을 완전히 탈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신 교육을 받고 자란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음을” 밝히는 국민교육헌장을 지금도 외울 수 있다. 내 어린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에는 “가시다니, 여사님, 육영수 여사님..”으로 끝나는 노래가 자리잡고 있다. 30개월간의 군대 생활은 위계질서와 권력 시스템에 대한 본능적 복종을 내 유전자에 심어 놓았다. 중대장이 내 투표용지를 가져가 노태우를 찍는 것을 방관함으로써 나 스스로 대한민국 군대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다. 지금 갑자기 박근혜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투 스타 앞에 선 이등병처럼 꼿꼿이 서서 관등성명을 우렁차게 외치며 경례를 붙일 것이다.
순간 순간 스스로 제어하지 않으면 나의 극우적 본능에 잠식당해 헛소리를 지껄이게 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계속되는 성공도 위험하다, 자기 반성을 어렵게 할 수 있으므로. 나는 그저 노망드는 시점이 최대한 늦춰지기를 바랄 뿐이다. 한 때 존경하던 사람들이 말년에 망가지는 이유는 계속된 성공으로 오만에 빠져 자신 속에 심겨진 극우성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멀리가면 당신은 진정한 애국자가 된다. 위정자들이 외국에서는 당하고 국민들에게는 군림하고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위정자들에게 모질고 가혹하게 당하고 있는 국민들의 모습이 불쌍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냉혹한 국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남과 북이 협력하는 것뿐임을 하루라도 빨리 모든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어진다. 두 정부는 서로 합심하고 또 서로 경쟁하면서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야 할 조직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며 증오를 부추기는 인간들이 가장 악질적인 매국노들임을 자각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유럽에서 한반도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생각을 유지할 수 없다. 결코 극우, 반공주의자가 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헌법 안 진보란 말은 또 얼마나 허구적인가? 사상의 자유는 바로 그것이 진짜로 보장되는 곳에서 느껴야 제대로 자각할 수 있다. 나는 가능한 모든 한국인들이 유럽으로 날아가보기를 바란다. 노을에 물든 바티칸 성당의 돌 계단에 앉아 한반도의 미래를 고민하는 바로 그 순간이 한국적 사상 검열의 제약과 내면의 극우성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성령 충만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두려워 말라. 국가보안법 따위는 당신 생각의 넓이와 깊이를 제한 할 수 없다. 필요하다면 마음대로 북한과 접촉해도 된다. 북한에 갔다와도 상관 없다. 원한다면 아예 북한에 가서 살아도 된다. 자유로운 생각에 장애물로 다가오는 모든 제약은 그 자체가 악이다.
당신이 받은 주입식 집단 교육, 당신의 경험적 판단은 모두 잘못되었다. 극우적 편견과 내면화된 위선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살아 있는 글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당신에게도 이것을 자각할 여행 기회가 제공되기를, 전 우주를 다 담고도 남을 사고의 깊이를 얻는 이 고양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기를.
여행: 어디를 가든 여행이란 결국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공간적 거리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자유로운 시간은 제한 없는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 다름과 차이는 나를 자각하게 만드는 계기이다. 달라지고 싶은가? 일단 떠나라. 흥분과 기대, 새로움과 변화는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으므로.
긴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들
나는 글로 남고 싶다. 내 글이 10년, 20년, 30년 후에도 읽히는 글로 남았으면 한다. 아니 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기를 바란다. 내가 쓰는 글이 이 시대 독자들이 공감하는 글이 되기를 원하는 동시에 백 년 후의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는 내용이기를 기대한다.
지금의 독자들 특히 젊은 친구들이 내 글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려면 내가 꼰대가 되지 않아야 한다. 술자리에서는 “요즘 젊은 놈들 말이야”,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이런 고루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지만 글은 이해심 많고 사려 깊게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자는 글에서 필자의 본 모습을 귀신 같이 발견해 낸다. 글과 본 모습이 같아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끊임 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글 쓰는 자가 끊임 없이 변해야 하는 이유는 독자와 함께 세상도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원래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만 세상이 변하기 때문에 노인이 되는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편협하고 독단적인 주장만을 시끄럽게 떠드는 꼰대가 되고 만다. 김진홍 목사는 박정희의 유신 독재에는 목숨 걸고 저항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을 지도자로 받아들일 만큼 전향적이지는 못했다. 그런 그에게 노무현이 지도자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나라가 망하려는 징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30년을 빈민운동에 헌신했던 김진홍목사가 뉴라이트로 변신하여 사기꾼 이명박을 지지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제 진보였던 사람들이 오늘 보수, 수구 꼴통 혹은 꼰대가 되는 것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정치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것이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변화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꼰대가 된다.
실내 흡연 금지를 참지 못하고 예외를 요구하거나 길거리 흡연 금지에 분노한다면 이미 우리는 낡은 사람이다. 이성의 하급자에게 야한 농담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면 아무리 고매한 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더 이상 당신의 주장은 이 사회에 유효하지 않다. 그저 입을 닥치는 것이 그나마 마지막 품위라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대책일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애완견을 안고 가는 여성을 꼴사납게 여겨서도 안 된다. 동성 연애에 대해 혐오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를 표출해서도 안 된다. 최근에는 젊은 친구들이 근친 상간에 대해서까지 전향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근친 상간이 유전적으로 열등한 자손을 만든다는 주장은 우생학의 일종이므로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동성 연애와 근친 상간은 별 차이가 없다. 기형이 나오든 아니든 두 개인이 서로 사랑하고 그 결과를 감수하겠다는데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간섭한단 말인가?
하지만 안심해도 좋다. 아직은 근친 상간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해서 꼰대 소리를 듣지는 않으니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지는 마시기를, 세상의 상식이라는 기준이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한 당신도 곧 도태될 수 있으니까.
100년이 지나고 나면 지금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수 많은 것들이 구태의연한 것이 될 것이다. 100년 이후에도 의미 있는 글로 평가 받기 위해서는 현재의 금기와 제한을 넘어선 사상에 기반하여 사고할 수 밖에 없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감히 인간의 평등을 주장했던 동학이 그 후 재평가 받듯이 지금 우리의 생각을 제한하는 커다란 금기들은 시간이 지나가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통일 후에는 남북한의 정치 사상적인 제한도 사라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얼마나 통일에 기여했는지 여부로 2010년의 사상을 평가할 것이다. 긴 시간 노출을 한 사진에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듯이 지금의 세태에 영합한 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고 말 것이다. 오늘 남북한의 증오를 부추기는 사람들, 종북이란 용어로 사상 검열에 나선 자들은 모두 한 때의 현실에 매몰된 자들에 불과한 것이다.
멀리 가서 깨달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길게 볼수록 글은 더욱 더 진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사고의 틀은 먼 미래에 기반하게 되고 사고를 제한하는 사상 검열은 받아들이지 않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불온하고 위험하며 극단적이고 레디컬해지게 된다. 금기를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금기를 건드리게 된다. 글에서 남한과 북한의 구별이 없어지고 검열과 속박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위험해도 어쩔 수 없다. 오래 살아남는 글이 되려면 남한과 북한을 초월한 사상, 이들을 모두 포섭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일제 시대가 10년 이상 계속되자 조선의 독립을 염원하던 사람들은 지치기 시작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버티지 못하고 일제에 투항하고 말았다. 1940년, 일본의 통치가 30년 이상 계속되자 그동안 어렵게 참아왔던 자들까지 변절을 했다. 그들은 버텨왔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더 손해가 컸으므로 이를 벌충하기 위해 더욱 더 극성스럽게 친일 행각에 나섰다. 1944년, 몰락이 임박한 일제의 통치가 과격하게 변해가자 마지막까지 버티던 자들마저 끝내 기회주의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들 눈에는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오히려 강력한 힘의 발현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므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의미한 아집에 불과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마지막 자존심까지 내던지며 동포를 팔아 부귀영화를 갈구하는 아귀다툼을 벌이게 된다. 학도병, 정신대, 가미가제, 창씨개명, 충성 혈서… 한반도는 광란의 도가니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해방이 되었다.
나는 이 시대가 아직 1930년도 지나지 않은 일제 시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퀴벌레처럼 나타나 망언을 일삼는 기회주의자는 더욱 더 창궐할 것이다. 수구 집단에 대한 충성 경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계속될 것이다. 국민을 위하는 정권으로 3년 후에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아니 늦어도 8년 후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가? 당신의 기대는 배신당할 것이다. 그 날은 당신의 기대보다 훨씬 더 나중일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바라는 그 날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마치 그 날이 이미 오늘 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긴긴 일제의 폭압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도 해방 후의 미래를 그리면 희망을 잃지 않은 선조가 있었듯이 오늘 우리의 행동이 미래에 어떻게 평가 받을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작가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일 것이므로.
미래를 그리면 산다고 해서 오늘의 현실을 천박하다고 외면한 채 천상의 노래만을 부르고 살아서는 안 된다. 미래의 평가를 바라고 글을 쓸지라도 결국 내 글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생각이 미래에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 현실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에 기반한 글, 현재와 미래에 모두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물론 이것도 너무나 어려운 도전이다. 지금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런 불온한 글쓰기는 매우 위험하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 과격한 생각에 비해 글은 훨씬 부드럽고 그래서 초라하다. 단어 하나마다 나는 현실과 타협한다. 타협하는 글쓰기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오늘도 이것이 나의 한계임을 절감한 채 비겁한 안전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하루 하루 살아가는 이유는 비록 오늘은 비겁하지만 어쩌면 내일은 용감하게 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멀리 가서 깨달은 것과 길게 볼 때 알게 된 것은 결국 같은 것이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만 조선의 사문난적과 같이 당대에는 환영받기 어려운 길로 인도하게 된다. 그 끝이 어떻든 나는 이 길을 갈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글쟁이, 내면의 극우성을 자각한 자. 글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길 이외에는 없다고 믿으니까.
재평가된 책: 그 시대에 용납될 수 없던 책이 재평가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치적 금기보다는 성적 금기에 대한 평가가 훨씬 더딘 편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같은 사상서와 달리 <즐거운 사라>는 아직도 해금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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