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애자 - 초라한 질문 본문
애자 – 초라한 질문
글쟁이가 주인공인 영화, 물론 구십 프로는 자전적인 내용일 것이다. 미운 편집장, 미운 친구, 미운 애인, 미운 오빠, 미운 세상…… 불합리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가해자들을 고발하고 싶다. 관객들이 공감하겠지, 어머 이건 내 얘기잖아…… 주인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시간이 흘러간다. 아주 자알 흘러간다. 본업은 망가지고, 애인은 바람나고, 오빠는 또 돈 뜯어 가고, 엄마는 죽어가고…… 아무 것도 없다. 뭔가 바꾸어보려는 노력도, 깨달음도, 화해도, 후회 조차도…… 그냥 죽은 엄마 장례 치른 이야기. 새로운 희망? 뭐 이런 거 없다. 엄마가 죽으면 울고, 애기가 태어나면 웃는다. 어려움도 없다. 엄마는 힘 있는 수의사, 자식들은 모아 놓은 재산 뽑아 먹는 중이고, 담담 의사는 엄마의 친구, 남들은 가지지 못해서 안달인 애인을 강아지처럼 대해도 된다. 글 솜씨는 천부적이고, 자기 글 재탕해서 응모하고도 이를 지적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심지어 엄마의 원 포인트 강습으로 휘파람 실력이 중급까지 상승한다. 실종된 땀과 노력.
모녀: 감정을 자극하는 코드. 우리는 부모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이런 장면을 보면 조건반사 식으로 감동에 젖는다.
아주 시끄럽다. 핏대를 세우고 대사를 친다. 엄마와 딸이 말하는 장면마다 짜증이 밀려온다. 정말로 나는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봐야 했다. 인이어 이어폰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정도. 이건 과장 없는 사실이다. 엄마의 장례식, 공감 코드로 이끌려온 아줌마들이 극장에서 훌쩍거린다.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이 진행되어 온 영화에 몰입하지 못한 나는 심슨의 대사가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장례식에 참석한 심슨은 졸다가 말한다. "마지, 지루해, 채널 돌려" 영화가 끝났다. 엄마의 부재가 주는 빈자리는 보여지지 않았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희망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딸은 전혀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쓸데 없는 자전 소설 펼쳐보는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에서 아무런 애환도 느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나를 역으로 반성시켰다. 마케팅 책들이 주장하는 인간의 본능을 활용한 서사 구조, 궁금증 유발하기, 복선 깔기, 추리식 이야기 전개……. 이 따위 것들을 혐오했는데, 오히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단선적 시간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구조를 비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영화는 좀 더 미스터리하게, 좀 더 깊은 갈등 구조, 좀 더 과격한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아니 그것이 가장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위대한 것들이 위대해 진 것은 이런 마케팅적인 테크닉 덕분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너무나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대해진 것들이 위대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위대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질문은 너무나 초라하다. 아니 무슨 질문을 했었지? 나는 아무런 구체적인 질문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영화는 애써 좀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모든 단점이 용서되고 오래 기억되는 감동적인 영화로 각인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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