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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이 시대의 우화 : 얼굴 없는 목소리 본문

글 쟁이로 가는 길/다시 만들고 싶은 영화들

이 시대의 우화 : 얼굴 없는 목소리

미닉스 김인성 2011. 8. 21. 23:43


다시 만들고 싶은 영화들

 

 

 

지나간 영화들이 있습니다. 극장에 다시 걸릴 일은 없지만 미디어의 발달 덕택에 원한다면 쉽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 굳이 찾아 다니지 않아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TV에서 다시 볼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좋은 영화를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또 하고…… 재미있는 것은 지겨워서 쳐다 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반복적으로 틀어주니까요.

 

이런 식으로 완벽한 가족 영화의 대표격인 영화 나 홀로 집에는 감동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버려 더 이상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지요. 그저 익숙해져서 채널을 돌리지 않을 뿐……. 캐빈의 깜찍함도 조페시의 멍청함도 세월에 묻혀 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위대한 영화의 단물을 다 빨아 먹어 버리다니……

 

그러나 한 편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영화들도 많습니다. 아주 가끔씩 다시 꺼내볼 때마다 이런 기막힌 영화가 묻혀있는 것이 가슴 아픕니다. 우리를 울고 웃기며 잠시 삶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들, 그 자체로 완벽하여 조금도 손 볼 필요가 없는 것들, 그냥 다시 극장에 걸어도 될 것 같은 영화들이지요.

 

하지만 세상은 반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리메이크도 안 됩니다. 속편은 원작의 감동을 갉아 먹을 뿐이지요. 그래서 제가 상상하는 것은 이런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감동의 요소를 분해하여 새로운 조건 위에서 다시 펼쳐보는 것,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원작에서 느낄 수 있었던 그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영화 한 편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들, 그들이 줄 감동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 싶습니다. 결국 다시 만들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제 생각을 이어받게 된다면 이 글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테니까요.

인성.


이글은 영화를 통째로 보여주는 극악의 스포일러 문서입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 중에서 이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기를 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4. 얼굴 없는 목소리

 
1987년 12월 20일 MBC TV 베스트셀러극장에서 방영된 현길언 원작, 김승수 연출의 단막극. 원작의 힘도 크지만 이홍구 극본이 유난히 크게 다가옵니다.
이미지 출처: MBC 프로덕션 제공 얼굴 없는 목소리 비디오 캡쳐(이하 동일)

 
이 영화는 중견 간부 연수라는 설정으로 체제의 억압 방식을 고발했던 소설을 바탕으로 한 TV 드라마였습니다. 이 글이 발표될 당시는 전두환의 폭압정치가 정점을 달하던 1985년경이었고 소설가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썼습니다. 소설은 그 어떤 탈출구도 보여주지 않고 암울하게 진행됩니다. 소설도 현실도 절망은 깊었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만들어지던 1987년의 겨울은 달랐습니다. 6.10항쟁과 6.29 항복선언을 거치면서 4.19와 80년 봄과 같은 해방구가 도래했었습니다. 저는 9사단에서 병장으로 군대 생활을 했었는데 점심을 거르고 짱 박혀 노태우의 6.29 선언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80년 계엄 때 서울에서 점령군으로 학생들을 조졌던 일을 자랑스럽게 떠버리고 다니는 하사관들이 바글대던 9사단, 또 다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충정훈련으로 날을 지새던 어느 날, 미국의 특별 안보 보좌관이 전용기로 한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몇 시간 후였습니다.

그 때 들었던 노태우의 음성은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민간인을 학살하러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들었던 놀라운 이야기…… "구속자를 석방 하겠습니다. 언론 자유를 보장하겠습니다. 직선제 개헌을 실시하겠습니다" 온 몸에 짜릿짜릿한 전율이 흘렀고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선한 자의 옳은 소리보다 악한 자들의 참회의 목소리가 몇 배나 더 감동적이란 사실을. 저는 그 때 또 깨달았습니다. 선한 자의 한가지 잘못은 그 동안의 모든 선행을 다 무효화 시킬 수 있으며 악한 자의 한가지 선행은 일생을 통해 계속한 악행을 다 덮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사회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었습니다. 새롭고 긍정적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 희망 넘치는 해방기에 우화적이고 정치적인 이 독특한 소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놀라운 이야기로 변모합니다. 그 때 제가 받았던 충격을 여러분들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세웅그룹은 회장 맏아들이 경영권을 넘겨 받으면서 43명의 중견 간부를 위한 연수를 기획합니다. 간부들은 으레 그렇듯이 며칠 푹 쉬고 오는 일정이라고 여기고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연수원은 기대와 달리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그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오로지 방송으로 지시하는 목소리만 들려올 뿐입니다.


방송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일렬종대까지 취해야 했습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들뜬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연수 내용에는 관심도 없고 편하게 지내려고 마음 먹었기 때문에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조금씩 이 기이한 환경에 길들여지기 시작합니다. 방송은 사소한 내용까지 바로 바로 참견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카메라까지 동원하여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기획조정실의 젊은 이부장은 이런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직원들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꼭 한 명씩은 있는 캐릭터.


얼굴 없는 목소리보다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이 부장이 더 미워지기 시작하는 직원들.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이유로 강의실에 직원들을 앉혀 놓고 마냥 기다리게 합니다.


방송의 간섭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자리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그들, 서서히 지쳐 갑니다.


준비도 없이 연수를 시작한 회사를 비난하며 항의하러 가려고 사람들이 나섰습니다.


아직 회사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기다려보자고 주장하는 이부장. 점점 더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습니다.


계획한 시간이 되자 목소리는 각자 알아서 서류와 옷을 챙긴 후 배정된 각자의 방으로 가도록 지시합니다.


이 부장은 이 모든 것이 새 회장이 자신들을 평가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바뀐 오너는 우릴 제일 먼저 이 곳에 초대 했어요. 앞으로도 우리가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각 방에도 목소리는 들려옵니다. 점심 식사 시간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옵니다.


그들은 방에도 카메라를 장치하고 있었습니다. 점심 집합 방송 후에도 혼자서 담배를 피우는 그를 목소리가 꾸짖습니다. "1-03번 방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서둘러 주세요. 시간은 금입니다"


또 다시 방송이 그들을 괴롭힙니다. 전원이 모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사를 시켜주지 않고 강당에서 기다리게 하고 있습니다.


차멀미 때문에 방에서 자는 사람이 있어서 식사가 취소될 지경입니다. 같은 방 사람에게 데리고 오라고 독려하지만 식사 할 수도 없는 사람을 왜 데려와야 하냐며 거부합니다.


단체 행동을 위해서 아파도 참석 시키라며 사람들은 계속 화를 내지만


시간은 흐르고 식사가 자동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처사에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이부장은 말합니다. "이렇게 해야 통제가 됩니다. 굶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합시다. 불만인 사람은 나가세요.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는 점점 회사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감을 잡고 다음의 흐름을 판단해 앞서가야 합니다. 발전의 폭은 소원의 강도에 비례한 법이지요. 그의 모습을 보며 심부장은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을 떠올립니다. "전엔 나도 그랬었죠" 열정도 희망도 충성심마저 사라진 심부장, 무기력한 80년대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복종에는 풍족한 음식으로 대해줍니다. 한끼의 식사를 대가로 이미 엄청난 규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식사에 여넘이 없어서 이 모든 것이 방송되고 있음에도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독특한 세웅의 로고, 아직은 괜찮습니다.
(동영상입니다. 클릭해주세요) 

1987년 6.29후에 사회에서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지만 군대는 달랐습니다. 군에서는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 작업이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신체검사를 받은 사람들이 일주일 만에 입대했고 제대 특명은 점점 늦어져서 나중에는 삼 주씩 밀렸습니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서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에 대한 이간질이 시작되었고 병사들은 오전 근무만 한 후에 오후에는 전투체육과 휴식 그리고 정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규정보다 더 풍부한 식사에 질려갈 때쯤, 각 지역적인 특성과 성향에 따라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를 열심히 옹호하며 서로 싸우던 병사들은 점점 주위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야, 우리가 누구냐? 노태우 사단 아니냐? 우리가 안 찍어주면 누가 찍어 주겠냐?" 그 때 한 상사의 말이 모든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사단 전체 외출 외박 휴가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대통령 선거 후 일주일 후에 제대 예정인 저는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고 개겨서 하루짜리 외박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삭발은 항명으로 받아들여져 보안사에서 찾아오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놀란 대대장에게 "군대 머리 없애고 민간인 머리카락으로 새로 기르고 싶어서 깎았다고" 증언하기로 약속하고 얻은 외박이었습니다. 저는 이 답답한 상황을 선배에게 전화로 토로했으나 그는 제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 빨리 제대하고 나오기나 해" 한 명의 군인도 보이지 않는 일산에서 저는 외로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부재자 투표가 진행된 12월 초, 우리들은 조용히 한 명씩 중대장 실로 가서 공개적으로 노태우 후보를 찍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거 할 짠빰이냐?" 솔선수범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군대, 까라면 그냥 까면 되는 철저한 계급사회, 그리고 마지막 선물로 제 스스로 민주주의까지 더럽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젠 제가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민주니 자유니 그 따위 것들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북한이 보이는 대공초소에서 저는 무엇을 지키려고 거기 서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맛있는 저녁 후에는 선대 회장의 어록을 듣습니다.


포만감에 젖은 사람들은 안락한 일상으로 돌아 왔음을 알고 행복해하며 잠이 듭니다.


그러나 새벽 두 시, 갑자기 비상 벨이 울립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는 비상사태임을 알립니다.


불이 난 줄 알고 급히 뛰어나온 사람들에게 목소리는 훈련이었음을 알립니다.


"재밌네요.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 편을 드는 이부장.


급기야 사람들이 폭발합니다. 중견 간부를 상대로 이 따위로 교육을 진행하는 것에 항의하러 몰려갈 태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방송은 일부 간부들의 방 이동 조치를 발표합니다.


그제서야 오후에 배고프다고 민가에 가서 닭을 잡아먹고 고스톱을 쳤던 사람들이 연수원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밝혀 집니다.


잘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람들은 황급히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단결을 호소하던 한부장만 쓸쓸히 남아서 허공에 대고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들 이렇게 자신들이 없습니까?" 이렇게 긴 하루를 거치면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벽 6시 아침이 밝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운동도 하고


시키는 대로 구보도 합니다.


 
이젠 새 회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푸짐한 아침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역시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선택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새 회장은 말합니다. "세웅의 미래는 바로 여러분들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기쁘고 힘이 납니다. 권력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할 뿐입니다.


은밀한 소문이 그들의 작은 저항 의지마저 꺾어 놓습니다. 세웅의 로고가 머리에 각인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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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16일, 약 200만 표 차이로 노태우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물론 그 때 군인 숫자가 60만이었던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이미 개표 확정 전에 정확한 당선표차가 인쇄된 신문이 배포되었고 부정선거 시비가 있었으며 친구 녀석들은 구로동에서 투표함을 지키다가 개 맞듯이 맞기만 하고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지만 크게 이슈는 되지 못했습니다. 해방의 시기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민주화의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그 후로 또 다른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절묘하게도 소설은 암흑기에 씌어졌지만 드라마 제작은 해방의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방송은 새로운 암흑기의 시작 시점에 방영되었습니다.

노태우를 당선 시키는데 일조한 제대병들은 사단 대기소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이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모든 병사가 말년인 특이한 내무반에서 저도 이 드라마를 함께 시청했습니다. 마치 이등병들이 자대에 와서 당황하는 듯한 모습의 드라마 앞부분 전개를 낄낄대며 시청하던 예비역들은 점차 억압 구조가 우리들이 겪었던 지난 몇 달간의 시간과 닮아가자 말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로 나타난 세웅 로고에 다들 실소를 했습니다. 짜증을 내는 녀석들도 생겨났습니다. 드라마는 점점 더 우리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일일이 간섭하는 방송 목소리에 복종하기 시작합니다.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번호로 상대방을 부르라고 명령합니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을 참지 못하고 심부장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뭔가에 억눌려 지친 상태로 이렇게 목소리에 질질 끌려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며 그를 만류합니다.


"심선생 그냥 시간만 때우다 나갑시다. 이건 아무 의미 없는 거에요. 그냥 폼이라니까요. 폼. 그러니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여전히 버티며 무의미한 토론을 거부하는 심부장에게 그는 말합니다. "내 말 농담으로 들으세요. 심형! 어떻게 세웅에서 부장까지 진급하셨소?" 사람들이 낄낄대며 그를 비웃기 시작합니다.


심부장은 15년 동안 세웅에서 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새롭게 뭔가를 시작할 시기도 지나버렸습니다. 이젠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도 없습니다. 두려운 것은 이렇게 가다가는 또 다른 15년이 지난 후에 더 큰 후회를 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회사는 가혹하게 간부들의 죄를 거론합니다. 완벽한 인간은 없는 법, 선한 인간의 나쁜 점 하나로 그들을 옭아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영상입니다. 클릭해주세요)  

이렇게 하여 철저한 계산에 의해 사람들을 서서히 억압해가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징계에 대한 공포와 감시에 의한 명령으로 이 구조에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각자의 죄의식까지 건드려 자기 검열을 하게 합니다. 체념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는 조직으로 변해갑니다. 파편화된 군중은 이제 무기력하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민주화 이전의 시절이 이랬고 또 다시 그런 세월이 찾아 왔습니다. 만약 대중들이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 상황은 바꿀 수 없습니다. 극소수의 억압자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것을 뺏어서 더욱 더 공고한 성을 쌓으려 하고 있습니다. 사기꾼이 득세하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자기 희생의 삶을 살아온 민주화 세력을 비아냥거리며, 그들의 정의감을 비웃고, 왼쪽 날개를 스스로 잘라 버린 사회. 아무런 보답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또다시 나서야 합니다. 야속한 세상은 아직도 우리들에게서 더 많은 희생을 원하고 있는 듯 합니다.

누구보다도 회사 편이었던 이부장이 놀랍게도 조심스럽게 연수원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통제실은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있습니다.


회장의 일대기가 방송됩니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일제 순사들을 응징했을 정도로 정의감이 불탔던 회장님,


가난과 가출, 만주에서의 고생에 대한 이야기. 지겨운 내용으로 대부분 졸게 되는 아이템.


카메라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녹화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과 달리 이부장은 회사에 맹목적으로 충성하지도 체념하지도 않았습니다. 연수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스스로 조사하고 다녔습니다. 영화도 드라마도 소설도 모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아웃사이더로 취급하며 잔인하게 억압한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이보다 더 억압된 세월을 살아 온 우리들은 잠깐 동안의 자유는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일탈에 불과함을 잘알고 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는 그냥 잠시 세상이 정신 나가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정의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고 배우지만 실상은 이명박정부에서 중용되는 자와 같은 기회주의자들만이 득세하는 법입니다. 친일파의 나라, 제국주의 미국의 변방, 권력의 권위를 외부 세력에게서 찾던 오랜 세월의 관성은 결코 쉽게 되돌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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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겨울 내무반 예비역들은 이 드라마를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반복되는 세웅 로고에 절망하여 채널을 돌려 버렸습니다. 좀 더 웃기고 편안한 방송을 원했기 때문이지요. 솔직히 말해서 일상에 지친 불쌍한 사람들에게 방송에서까지 괴롭히는 것은 죄악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재미있는 버라이어티 예능 방송이 최고가 아닐까요?

군대에서 다 못 본 엔딩을 위해서 1988년 사만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방송 녹화본을 구입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드라마 복사본을 추억으로 묻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년 전은 노무현을 욕하는 사람들도 정말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던 시기입니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 속의 권력자들의 음모가 현실감이 없이 남의 일로 여겨졌던 시기, 국가가 인권에 관심을 갖던 시기, 우리 역사상 가장 특이한 시기를 우리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었던 정신적 충격과 군대 생활의 트라우마를 잊어도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 알지 못했습니다. 이 테이프가 더 이상 가치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하는 것과 정의란 이토록 가냘프고 위태로운 것임을......


사람들은 점점 목소리에 동화되기 시작합니다. 감시와 조종을 받으면서도 그 것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갑니다. 이젠 목소리가 강요하지 않아도 열심히 토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더 시키는 대로 잘하는지 경쟁까지 함으로써 완전한 복종이 완성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은밀히 전해지는 소문에 의해 불만 있는 사람들이 한 명씩 제거되고 있음이 알려집니다. "심부장도 조심하세요." 그들은 이 소문의 공포에 의해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에 협조하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더 적극성을 보였던 이부장은 이젠 악몽을 꾸며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부장에 비해 이부장의 고민의 깊이가 더 깊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보여지는 장면.


다들 체력 훈련도 훌륭히 통과하고


야간 산악 행군도 무사히 끝마쳤으며


마인드콘트롤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내 머리는 풍부한 업무 지식으로, 내 눈은 예리한 관찰력으로, 내 입은 창의적인 설득력으로, 내 가슴은 불타는 정열로, 내 두 다리는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세웅의 간부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내고야 만다. 나는 마침내 해내야 한다"


갑자기 완전히 바뀐 사람들의 모습이 이부장은 오히려 염려스럽습니다.


1분 스피치 시간입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참회를 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이번 연수에 다들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카메라는 이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녹화하고 있습니다.


심부장은 참회를 하지도 반발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할 말이 없다고 자신의 시간을 포기해 버립니다. 우유부단한 우리들의 모습.


이부장은 말합니다. "저는 제가 회사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밤낮없이 뛰어 왔습니다. 특히 이번 모임에서는 언제나 앞장서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해왔습니다"


경멸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심부장.


그 때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고 있었습니다. 회사는 우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중에서 누구를 제거해야 할 지 고르고 있었단 말입니다."


"스파이를 심어 놓고 조작된 소문을 퍼뜨리고 밥을 굶기고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중간에 쫒겨갔다는 사람들도 다 각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새 회장의 측근이었습니다." 이부장은 조목조목 회사의 공작 내용을 고발합니다.


"우리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문과 얼굴 없는 무법자 저 목소리에 끌려 다니며 알 수 없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배신 당했습니다. 이건 음모입니다. 우리들이 없는 사이에 대규모 인사 이동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회사를 성토하며 이부장에게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불이 꺼지고 이부장이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나갑니다.


이부장이 끌려나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심부장.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이부장을 돌려 달라고 외칩니다.


다시 갑자기 불이 켜집니다. 밝은 불빛 때문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용기를 잃어 버립니다. 목소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합니다. "이것으로 일분 스피치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편안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방금 일어난 일을 잊고 목소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억압과 굴욕, 불합리에 대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심부장은 안타까움에 잠들지 못하고 불면의 밤을 보냅니다.


원작 소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87년 6.10 항쟁이 있기 전까지 소설이 무협 액션이 아니라면 여기서 끝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문학은 우리를 고뇌하게 하고 반성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지요. 문학적 공간 안에서 제기된 문제를 누군가가 해결해 준다면 그것은 액션 활극의 슈퍼히어로 코믹북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황지우시집, 용도 폐기된 지 오래인 시들, 그는 이제 해탈하여 선과 낭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런 그를 다시 불러낸다는 것은 죄악이기 이전에 사실 "쪽 팔리는" 일입니다.


그의 시는 오늘의 네티즌과 닿아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 이전에, 하이텔 이전에 그는 이미 블로그식 글쓰기를 완성했습니다. 쫄깃쫄깃한 그의 문장들이 서문에서도 빛나고 있습니다.


고문 받은 시인에게는 시가 무기가 되는 것일까요? 불합리한 권력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의 민중은 그에게 절망을 주고, 영원히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은 그가 비아냥거리고 비틀고 해체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이 어처구니 없는 세상은 답답하다 못해 절망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피가 묻어 납니다.


얼굴 없는 목소리 앞에서 우리들도 자동인형처럼 길들여졌습니다. 시인은 영화를 보러 가서도 무기력한 우리들을 질타하는 일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지만 우리들은 그냥 주저앉아서 닥치고 영화나 감상합니다. 그렇게 통제는 완벽해졌습니다. "질서는 편한 것, 질서는 또한 아름다운 것"


그러나 이 드라마가 만들어진 시간이 해방기의 시기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황지우의 시나 현길언의 원작처럼 이 드라마는 패배주의로 끝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슈퍼영웅물이 아닌 원작을 무리하게 변형함으로써 끝 부분이 조금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마무리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각색자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각본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독재가 부활하려는 시점에 생각해보면 우리 역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주체적인 노력으로 얻어낸 해방의 시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정말 건강한 결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또 한 겹의 패배주의가 깔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관점은 너무 어렵게 세상을 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나름의 쓸데없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지막 결론을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MBC가 혹시라도 이 드라마를 재방송한다면 여러분들에게는 이 글이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식이든 이 드라마를 다시 볼 기회가 생기시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이 글의 제목처럼 저는 다시 이 드라마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09년의 세웅관: 남한강종합수련원은 kobaco 연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세웅관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는 끝납니다. "두두두두둥 빰 빰 빰 세~~~웅~~~"
(동영상입니다. 클릭해주세요)  

김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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